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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바로 하나님! 주님께 돌아가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이야기하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이 끌어당기시면 그 끌어당김에 끌려가면 된다! 진짜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된다! 책 <방탕한 선지자>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은 나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난 요나처럼 때론 집나간 둘째 아들이었고, 때론 불평하는 첫째아들이었다. 그러나 요나에게도, 둘째아들에게도, 첫째아들에게도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나에게도 역사하셨다. 또한번 사랑을 주셨다. 하나님은 정말 귀하신 분이다. 내게 과분할 정도로 선하신 분이다. 그럼에도 그 과분한 선하심을 늘 경험하고 싶다. 주님또한 경험하라 하신다. 근데 또 내가 언제 어려움을 만날지 모른다. 또 내가 주님과 멀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 날 내가 하나님보다 나의 감각을 믿었던 일이 또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깨어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선한 주님의 손 꼭 붙잡고 있도록! "주님, 내가 당신의 자녀답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세요. 당신의 지혜와 은혜로 삶을 꾸려나가게 도와주세요. 당신이 허락하신 인생의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게 해 주세요. 당신의 은혜에 늘 감격하도록 인도해주세요. 당신의 자녀라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의 일부 ↓더보기33. 요나서는 하나님이 때로는 요나의 손을 잡고, 때로는 멱살을 잡아 이끄시면서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런 것들을 보여 주시는 이야기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도, 주님이 언제나 한 걸음 앞서신다. 하나님 역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시면서 그분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신다.
96. 지난 일을 돌아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들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가 가져다준 결과임을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런 일들은 당시에는 힘들거나 심지어 고통스러운 사건들이었지만 나중에는 그로 인해 우리가 미리 내다볼 수 없었던 큰 유익이 되었다.
110.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배에서 구해내시지만, 곧 분명해지다시피 요나의 회개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결점 많고 갈피를 못 잡는 우리와 함께 참을성 있게 일하신다.
145. 요나의 마음이 그와 같았다. 그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철저히 파악한 것처럼 보일 때마다, 사실은 더 깊이 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람 마음이 '근저'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주님, 그것을 주신다면 주께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진짜 근저에 놓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그의 행복에 더 근본적이다.
151-152. 그러나 바울은 자기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운다고 말하고, 요나도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갈 5:17, 엡 4:22-24) 물론 이것을 핑계로 나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인간 마음을) 총체적으로 아시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사랑과 오래 참음에는 다함이 없어 반항하는 자녀의 손을 계속 잡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156. 우리는 많은 것이 필요하고, 그 필요를 채워 주는 많은 것에 정서적인 애착을 갖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없다. 그분은 자기 안에서 더없이 완전히 행복하시고, 우리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애착을 갖게 되신 것인가? 유일한 답변은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자족하시는 신적 존재가 자발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158.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자기 삶의 의미도 모르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게 해 줄 안내자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그런 영적 안개, 영적 어리석음에 휩싸인 사람들 내려다보시며 “바보 같은 놈들!”이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곤경을 자초한 사람들을 보고 "꼴좋다"라고 말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어떤 바보들이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조롱의 글을 올린다. 또 우리는 다른 정당 사람들이 패배하면 그저 고소해한다. 이 모두는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방식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만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불행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에서 그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진정한 긍휼, 우리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붙들어 맨다는 것은 그들의 슬픈 상황 때문에 우리가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처지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단히 불편하지만, 이것이 바로 긍휼이 성품이다.
161. 우리 주님이 겪으신 감정들. (중략) 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시는 대목이 한번 나온다면 우시는 모습은 스무 번 나온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었는데, 우울한 천성을 타고 나서가 아니었다. 그분은 성령과 아버지 안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셨다(눅 10:21). 하지만 웃는 것보다 훨씬 많이 슬퍼하셨다. 그분의 긍휼이 우리를 그분과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슬픔이 그분을 슬프게 했고, 우리의 고통이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165. 그녀는 성경이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멜로드라마에는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일차원적인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녀의 말은 이렇게 이렇게 이어졌다. “저는 성경의 하나님이 멜로드라마의 등장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교도들을 벌하고 신자들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 본 거죠. 하지만 이 책의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이분은 극도로 복잡한 분이세요. 때로는 신자들에게 복 주시고 이교도들을 심판하시지만, 또 다른 때에는 이교도들에게 복 주시고 신자들을 벌하세요. 진노의 존재 혹은 사랑의 존재가 아니라 둘 다이고, 그 모습이 뜻밖의 방식으로 드러나는군요”
170.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이 믿을 때 그 또는 그녀는 ‘시물 유스투스 에트 페카 토르’이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라는 뜻이다.
173. 이야기 전체가 하나님이 요나를 뒤쫓으시는 내용인데,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폭풍으로, 나중에는 부드러운 질문과 논증으로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방법은 달라도 목적은 여전히 동일하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거부하고 독선을 고집하고 있음을 인식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마지막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신다. “너는 내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지 않지만,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너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요나야,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나와 함께해야 하지 않겠느냐?” 요나서는 어떤 대답도 없이 끝난다.
180. 아담과 하와는 “약해집시다. 우리의 삶과 다른 모든 사람의 삶까지 망칩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번창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안겨줄 것 같지가 않아. 우리 일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아.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어’ 요나는 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181.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되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기회를 놓치고 말 거야! 나는 행복해져야 해.” 이것이 자기 정당화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데서 시작된다.
233. 예수님은 우리를 배제할 분명한 권리를 가지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환영하시고 자신과 화해시키셨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두루뭉술하게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회개로 부르셨다. 그분은 우리가 환영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품어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에 합당하게 우리를 배제하고 거부하시지도 않았다. 우리 죗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자발적 희생의 죽음은 우리 죄와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우리의 결점을 아시고도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확신하게 해 준다.
237.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요나의 부르심은 구약성경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신자에게 내리신 명령이다. (마 28:18-20) 우리 모두가 설교자나 선지자, 선교사로 부름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자는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안전과 안정에서 기꺼이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 물리적 사회적 자리를 떠나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위험과 취약성은 언제나 감수해야 한다.
선교는 영적 엘리트나 여유가 있는 사람, 말재주가 좋은 사람, 외향적인 사람이나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모든 사람의 몫이다. 하나님은 본래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부르시고 복 주시고 반드시 내보내어 다른 이들에게도 복이 되게 하신다.
259.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도덕적인 사람이나 종교적인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263. 찰스 웨슬리가 서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럼,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인가? 없다! 그분을 영접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일 뿐이다." 이 대목을 듣는데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내게 밀려왔다. 나를 누르던 큰 짐이 순식간에 벗겨졌고, 내 마음은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 차서 불쑥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우리 구세주를 거의 본 것만 같았다! 나의 동료들은 내가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을 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후 거리로 나갔을 때 내가 밟는 땅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찰스 웨슬리도 루터의 저작을 통해 비슷한 체험을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래 갇혀 있던 내 영혼
죄와 본성의 밤에 단단히 묶여 있었네.
주의 눈이 소생시키는 빛을 비추시니 나 깨어났네. 지하 감옥이 빛으로 환해졌네.
쇠사슬이 끊어지고 내 마음 자유 얻었네.
나 일어나 나가 주를 따랐네.
은혜는 말하자면 우리 삶의 배경 음악이다. 그 음악이 우리 마음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면 그 노래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엡 5:19-20,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20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66. 요나는 하나님의 큰 물의 파도와 큰 물결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파도와 물결 아래 묻히셨다.
268. 구원은 주님께 속한 일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에게서 일부 나오고 주님에게서 일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가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가치 시다.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시면 좋겠지만 그분이 일하심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원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우리 삶에서 일하고 계신 것이다.
284.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을 닮으려면, 자기 보호라는 아늑한 세계를 버려야 한다. 긍휼의 하나님은 지구 저 위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며 그저 안됐다고 생각하실 수만은 없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말 그대로 인간의 신을 신고 우리 상황과 문제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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